쓰부라야 고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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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쓰부라야 고키치는 1964년 도쿄 올림픽 마라톤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일본의 육상 선수이다. 10,000m 종목에서 6위를 기록했으며, 마라톤에서는 2위로 달리다 마지막에 추월당해 3위를 차지했다. 도쿄 올림픽 이후 허리 통증과 결혼 문제, 자위대 체육학교의 압박 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1968년 멕시코 올림픽을 앞두고 자살했다. 그의 유서는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후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출신지인 후쿠시마현 스카가와시에서는 기념관과 마라톤 대회가 열리고 있으며, 명예 시민으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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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부라야 고키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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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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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고키치 쓰부라야 |
일본어 이름 | 円谷 幸吉 |
로마자 표기 | Tsuburaya Kōkichi |
다른 표기 | Kokichi Tsumuraya |
국적 | 일본 |
출생일 | 1940년 5월 13일 |
출생지 | 후쿠시마현 스가가와시 |
사망일 | 1968년 1월 9일 |
사망지 | 도쿄도 네리마구 |
키 | 1.63m |
몸무게 | 54kg |
대학 | 주오 대학 |
선수 경력 | |
종목 | 장거리 달리기 |
세부 종목 | 10,000미터 마라톤 역전 경주 |
개인 최고 기록 | |
10,000미터 | 28분 52.6초 |
마라톤 | 2시간 16분 23초 |
메달 기록 | |
올림픽 | 1964년 도쿄 육상 남자 마라톤: 동메달 |
2. 생애
후쿠시마현 스카가와시에서 태어난 쓰부라야 고키치는 1964년 도쿄 올림픽에 출전하여 10000m 종목에서 6위를 기록했다. 올림픽 마지막 날, 마라톤에도 출전한 그는 경기장에 2위로 들어왔으나, 마지막 한 바퀴에서 영국의 베이질 히틀리에게 따라잡혀 3위를 차지했다.[3] 이는 "남자는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아버지의 훈계를 지키려다가 트랙에서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탓이 컸다. 히틀리에게 패배한 것에 대해 굴욕을 느낀 쓰부라야는 동료 마라톤 선수 기미하라 겐지에게 "일본 국민들 앞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다음 멕시코 올림픽에서 달려 일장기를 들어 올려 보상해야 한다"라고 말했다.[5]
도쿄 올림픽 이후, 쓰부라야는 힘든 시기를 겪었다. 자위대 체육학교 교장의 압박으로 약혼이 파혼되었고,[4] 추간판 탈출증까지 발병했다. 1968년 1월 9일, 멕시코시티 올림픽 대비 훈련 기간 중, 자위대 체육학교 기숙사 방에서 면도칼로 경동맥을 그어 자살했다.[5] 그의 유서에는 "아버지, 어머니, 고키치는 너무 지쳐서 더 이상 달릴 수 없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세요. 걱정만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고키치는 부모님 곁에서 살고 싶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5]
2. 1. 어린 시절과 육상 입문
1940년 5월 13일 후쿠시마현 스카가와시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10] 집안은 농가였으며, 태평양 전쟁 말기 5살 무렵 산책 중 개울을 뛰어넘으려다 진흙탕에 빠져 허리를 다쳤다.[10] 의사 진찰 결과 허리뼈가 어긋났지만,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어 방치했고, 이것이 훗날 요통과 지병의 원인이 되었다.[10]스가가와 시립 제1중학교를 거쳐 후쿠시마현립 스가가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57년, 형의 권유로 지역 역전 연습에 참가하면서 육상 경기에 입문했다.[10] 같은 해 가을, 현을 횡단하는 역전 대회에서 고등학교 육상부 선수에 결원이 생겨 대타로 출전, 구간 최고 기록을 세웠고, 이를 계기로 정식 육상부원이 되었다.[10] 3학년이던 1958년, 전국 고등학교 종합 체육대회 육상 경기대회(인터하이) 5000m에 출전했지만, 다른 선수에게 왼발을 밟혀 신발을 벗고 17위로 골인했다.[10]
쓰부라야는 조반탄광에서 육상 경기를 계속하려 했으나 입사하지 못하고, 자위관으로 진로를 바꾸었다.[10] 1959년 봄 육상자위대에 입대, 가을에 구루메 주둔지에 배속되었다.[10] 주둔지에서 훈련 중 선배 대원에게 연습 상대를 부탁하여 함께 뛰기 시작했고, 점차 실력을 인정받아 자위대 관구 대항 역전, 동일본 종단 역전 등에 출전했다.[11] 1961년 11월 아오모리-도쿄 역전에서는 후쿠시마현 대표로 출전한 3개 구간 모두에서 구간 신기록을 세웠다.[10]
1962년 1964년 도쿄 올림픽을 대비해 설립된 자위대 체육학교가 올림픽 후보 육성을 위해 특별 과정 대원을 모집했을 때, 쓰부라야는 요통으로 선발 시험에 참가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타노의 강력한 추천으로 체육학교에 입교했다(육상 경기 선수 동기는 14명).[10] 입교 초기에는 요통으로 제대로 달릴 수 없었으나, 하타노는 Arthur Lydiard|아서 리디어드영어가 고안한 "리디아드 방식" 훈련(크로스컨트리 경주 중심)으로 통증을 완화시켰다.[10] 정규 코치는 하타노였지만, 본격적인 육상 경험이 없어 구체적인 지도는 어려웠고, 육상반 교관이었던 사와다 코우스케가 쓰부라야의 요청으로 코칭을 했다.[10] 쓰부라야는 도쿄 올림픽 동메달 획득 후 자위대원들 앞에서 한 강연에서 "메달 획득에 대해 사와다 교관 이외의 지도나 협력은 받지 않았다"라고 말했다.[10]
1963년 4월, 중앙대학교 육상 경기부 감독 니시우치 후미오의 권유로 자위관 신분으로 중앙대학교에 입학했다.[10] 니시우치가 쓰부라야를 권유한 것은 자위대 체육학교 교장 추천을 받은 올림픽 강화 본부장 오다 미키오의 요청 때문이었다.[10] 당시 중앙대학교 네리마 그라운드는 자위대 체육학교와 가까워 훈련 다니기 용이했다.[10] 진학 후 지도는 니시우치와 하타노가 분담했다(니시우치가 트랙 중심 기술/훈련, 하타노가 로드/생활·스케줄).[10] 쓰부라야는 관동 학생 육상 경기 연맹이 아닌 일본 실업단 육상 경기 연맹에 등록되어 있었다.[10]
2. 2. 자위대 입대와 올림픽 준비
쓰부라야는 1964년 도쿄 올림픽을 대비하여 전년에 설립된 자위대 체육학교에 입대했다. 요통으로 인해 선발 시험에 참가할 수 없었지만, 하타노 코치의 강력한 추천으로 입교가 결정되었다.[11]입교 초기에는 요통으로 제대로 달릴 수 없었으나, 하타노 코치는 뉴질랜드의 육상 지도자 Arthur Lydiard|아서 리디어드영어가 고안한 훈련 방법으로 통증을 완화시켰다.[12] 사와다 코우스케 코치가 에누구치의 요청을 받고 코칭을 했다.[13] 에누구치는 도쿄 올림픽 동메달 획득 후, 자위대원들 앞에서 사와다 교관 외의 지도나 협력은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14]
1963년 4월, 중앙대학교 육상 경기부 감독 니시우치 후미오의 권유로 자위관 신분으로 중앙대학교에 입학했다.[15] 당시 중앙대학교 네리마 그라운드는 자위대 체육학교와 매우 가까워 훈련이 용이했다.[16]
같은 해 7월부터 9월까지 오클랜드에서 열린 일본 장거리 선수 합숙에 참가했다. 8월 24일, 20000m 기록회에서 에밀 자토펙의 세계 기록을 넘는 기록으로 2위를 차지했다.[17] 합숙 후반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10000m 일본 신기록을 수립했다.[18]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10000m와 마라톤에 출전했다. 10000m에서는 일본 남자 육상 트랙 경기 사상 최초로 6위에 입상했다.[19] 마라톤에서는 초반 선두 그룹과 거리를 두고, 15km 지점부터 페이스를 올려 20km에서 4위까지 진출했다.[20] 30km를 지나 론 클라크를, 36km에서 Jim Hogan (athlete)|짐 호건영어을 제치고 2위로 올라섰다.[21] 국립경기장에 들어왔을 때는 2위였지만, 베이질 히틀리에게 추월당해 3위로 동메달을 획득했다.[22]
2. 3. 1964년 도쿄 올림픽
1964년 도쿄 올림픽에 출전한 쓰부라야 고키치는 10000m 종목에서 6위를 기록했다.[14] 이는 일본 남자 육상 트랙 경기 사상 최초의 입상이었다. 마라톤에도 출전하여 경기장에 2위로 들어왔으나, 마지막 바퀴에서 영국의 베이질 히틀리에게 추월당해 3위로 동메달을 획득했다.[3]쓰부라야는 히틀리에게 패배한 것에 대해 "일본 국민들 앞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멕시코 올림픽에서 달려 일장기를 높이 들고 속죄해야 한다"고 말했다.[3] 그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도 "앞으로 4년간 확실히 연습하면 멕시코에서는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 것"이라며 "은메달 이상"을 목표로 내걸었다.[15]
다음은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쓰부라야 고키치의 마라톤 경기 진행 상황을 나타낸 표이다.
구간 | 순위 | 5km 구간 기록 | 비고 |
---|---|---|---|
15km | 10위 | - | |
20km | 4위 | 14분 55초 | 아베베 비킬라보다 빠른 기록 |
30km | - | - | 론 클라크 추월 |
36km | 2위 | - | 짐 호건|Jim Hogan (athlete)영어 추월 |
국립 가스미가오카 육상 경기장 진입 | 2위 | - | |
결승선 | 3위 | 2시간 16분 22.8초 (최종 기록) | 베이질 히틀리에게 추월당함, 동메달 획득[16] |
이 동메달은 일본이 도쿄 올림픽 육상 경기에서 획득한 유일한 메달이었으며,[23] 시상식에서 일장기가 게양된 유일한 일본 선수였다.[23]
2. 4. 올림픽 이후의 좌절
1964년 도쿄 올림픽 이후, 쓰부라야는 여러 가지로 힘든 시기를 겪었다. 이 무렵 예정되어 있었던 약혼은 자위대 체육학교 교장의 "다음 올림픽에 집중하라"는 압박에 의해 파혼에 이르렀고,[4] 오랜 기간 겪어왔던 허리 통증은 점차 악화되어 추간판 탈출증이 발병하였다.2. 5. 자살과 그 이후
1964년 도쿄 올림픽 마라톤에서 영국의 베이질 히틀리에게 추월당해 동메달에 그친 쓰부라야 고키치는 큰 굴욕감을 느꼈다. 그는 동료 선수 기미하라 겐지에게 "일본 국민들 앞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멕시코에서 열릴 다음 올림픽에서 달려 일장기를 들어 올리는 것으로 보상해야만 한다."라고 말했다.[5]도쿄 올림픽 이후, 쓰부라야는 힘든 시기를 보냈다. 자위대 체육학교 교장의 압박으로 약혼이 파혼되었고, 추간판 탈출증까지 발병했다. 1968년 1월 9일, 멕시코시티 올림픽 대비 훈련 기간 중, 자위대 체육학교 기숙사 방에서 면도칼로 경동맥을 그어 자살했다.[5]
그의 유서에는 "아버지 어머니, 고키치는 이미 완전히 지쳐버려서 달릴 수 없습니다. 이 점 헤아려 주십시오. 마음 편할 일 없이 고생하시고 걱정하시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고키치는 부모님 곁에서 살고 싶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동메달을 든 채 숨진 채 발견되었다.[5]
쓰부라야의 자살은 오랜 여자친구 에이코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 것에 대한 감정적인 반응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에이코와 결혼하고 싶었지만, 군 상관들은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이후까지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고, 에이코의 부모도 결혼을 미루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5]
자살 유서에서 쓰부라야는 부모님, 형제자매, 코치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조카들의 건강을 기원하며, 부모님께 용서를 구했다.[6] 그는 자신의 목숨을 끊은 이유를 설명하는 두 장의 자필 유서를 남겼다.[7]
그의 자살 유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랑하는 아버지, 사랑하는 어머니: 3일 숙성 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맛있었습니다. 곶감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떡도요. 그것들도 정말 맛있었습니다.일본어
사랑하는 형 토시오,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 스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맛있었습니다.일본어
사랑하는 형 카츠미,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 와인과 사과 정말 맛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일본어
사랑하는 형 이와오,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 감사합니다. 바질 맛이 나는 밥과 난반 절임이 정말 맛있었습니다.일본어
사랑하는 형 키쿠조,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 포도주스와 요메슈(養命酒)가 정말 맛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누나, 항상 제 빨래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일본어
사랑하는 형 코조,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 차로 저를 데려다주고 데리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어오징어도 정말 맛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일본어
사랑하는 형 마사오,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 제가 걱정을 많이 끼쳐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일본어
유키오 군, 히데오 군, 미키오 군, 도시코 짱, 히데코 짱, 료스케 군, 타카히사 군, 미요코 짱, 유키에 짱, 미츠에 짱, 아키라 군, 요시유키 군, 케이코 짱, 코에이 군, 유 짱, 키이 짱, 쇼지 군: 너희들이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일본어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고키치는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만큼 지쳤습니다.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은 저를 걱정하고 돌봐주시느라 편히 쉬신 적이 없으셨을 것입니다.일본어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고키치는 당신들 곁에서 살고 싶었습니다.일본어
쓰부라야 고키치는 약혼녀와의 관계 및 결혼에 대한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을 겪었다. 약혼녀는 쓰부라야보다 한두 살 어렸으며, 1963년 홍콩에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기도 했다. 1965년 4월에는 결혼이 결정되었으나, 7월에 약혼녀의 변심으로 파혼될 뻔했다가 주변의 도움으로 다시 관계를 회복했다. 1966년 5월에는 결혼 이야기가 다시 나왔지만, 체육학교 교장 요시이케는 멕시코시티 올림픽 이후로 미루도록 종용했다. 결국, 약혼녀는 1966년 10월에 쓰부라야에게 선물과 편지를 모두 돌려보내며 파혼을 통보했다.
1995년, 약혼녀는 인터뷰에서 쓰부라야와 깊은 관계가 아니었으며, 일방적인 결혼 진행에 부담을 느꼈다고 밝혔다. 또한, 1966년 6월의 만남에서 요시이케 교장의 반대에 동의했다는 입장을 보였다.
쓰부라야는 주고받은 편지를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 내용과 약혼녀의 증언은 차이를 보인다.
한편, 쓰부라야의 코치였던 하타노는 1966년 7월 홋카이도로 전근을 가게 되었고, 이는 쓰부라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쓰부라야는 전 교장과 비교하며 요시이케 교장에게 불편함을 느꼈고, 체육학교를 떠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주변의 설득으로 체육학교에 남았다.
하지만, 쓰부라야의 성적이 부진했던 1967년, 安田矩明(야스다 노리아키)는 쓰부라야가 코치를 잃고 고민했다고 언급했다. 반면, 三宅義信(미야케 요시노부)는 하타노의 전근이 쓰부라야의 자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3. 주요 경기 성적
쓰부라야 고키치는 선수 생활 동안 여러 대회에 참가하여 다양한 성적을 거두었다. 다음은 쓰부라야 고키치의 주요 경기 성적을 정리한 표이다.
대회명 | 개최일 | 종목 | 기록 | 순위 | 비고 |
---|---|---|---|---|---|
청매 마라톤 | 1967년 3월 5일 | 30km | 2위 | 레이스 중 양쪽 종아리 경련 | |
미토 마라톤[22] | 1967년 3월 19일 | 마라톤 | 2시간 23분 37초 | 9위 | 생애 최악의 기록, 양쪽 아킬레스건 통증 및 요통 재발 |
제15회 전일본 실업 단체 대항 육상 경기 선수권 대회 | 1967년 5월 27일 | 5000m | 6위 | ||
1967년 5월 27일 | 20000m | 7위 | |||
1967년 5월 28일 | 10000m | 3위 |
1967년, 쓰부라야는 잦은 부상에 시달렸다. 3월 청매 마라톤에서는 2위를 기록했지만, 레이스 도중 양쪽 종아리에 경련이 일어났다. 같은 달 미토 마라톤에서는 양쪽 아킬레스건 통증과 요통이 재발하여 9위라는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고, 이는 그의 생애 최악의 기록이었다. 5월 전일본 실업 단체 대항 육상 경기 선수권 대회에서는 5000m 6위, 20000m 7위, 10000m 3위를 기록했다.
이후 쓰부라야는 7월까지 양쪽 아킬레스건이 연달아 파열되었고, 8월에는 추간판 헤르니아 진단을 받고 입원 치료를 받았다. 11월에 퇴원했지만, 결국 1968년 1월 9일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3. 1. 마라톤
1964년 도쿄 올림픽에 출전한 쓰부라야는 10000m 종목에서 6위를 기록했다. 올림픽 마지막 날, 마라톤에도 출전하여 주경기장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2위를 달리고 있었으나, 마지막 한 바퀴에서 영국의 베이질 히틀리에게 역전을 허용하며 3위로 경기를 마쳤다.[1] "남자는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아버지의 훈계를 따르려다 트랙에서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것이 패인이었다.[1] 히틀리에게 패배한 것에 대해 쓰부라야는 동료 마라톤 선수 기미하라 겐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1]"난 일본 국민들 앞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어리석은 실수를 저질렀다. 난 멕시코에서 열릴 다음 올림픽에서 달려 일장기를 들어 올리는 것으로 보상해야만 한다."[1]
도쿄 올림픽 이후 쓰부라야는 공식 행사 참석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1964년 11월 2일에는 고향 스카가와에서 개선 행렬이 열렸고, 같은 달 9일에는 아오모리-도쿄 역전 에키덴 3구간에 출전해 구간 신기록을 세웠다. 연말연시에는 일본육상경기연맹의 요청으로 남미 원정을 떠나 각종 대회에 참가했고, 1965년 1월 1일에는 2등 육조로 진급했다.
하지만 1965년 4월, 쓰부라야의 이중등록 문제가 불거지면서 6월에 예정되었던 즈나메스키 대회 학생 대표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7월에 문제가 해결되어 다시 경기에 복귀했지만, 8월 북해 타임스 마라톤에서는 중도 기권했고, 10월 제20회 국민 체육대회 1만m에서는 2위에 그쳤다.
1966년 2월, 쓰부라야는 간부후보생학교에 입교했다. 9월까지 이어진 재학 기간 동안 강의와 과외 활동으로 인해 제대로 된 육상 훈련을 할 수 없었다. 1967년 12월 3일, 국제 마라톤에서 데릭 클레이턴(호주)이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고, 사사키 세이이치로(佐々木精一郎)가 일본 신기록을 세우는 것을 지켜보며 쓰부라야는 최고 선수들과의 격차가 벌어졌음을 실감했다. 12월 하순에는 합숙에 참가했지만, 원하는 대로 달릴 수 없어 자전거를 이용한 보조 역할을 맡았다.
1968년 1월 7일, 쓰부라야는 체육학교 운동장에서 젊은 선수들과 함께 달렸고, 다음 날인 1월 8일에는 별푸 오이타 메이니치 마라톤(別府大分毎日マラソン) 코치를 맡을 예정이었으나,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3. 2. 트랙 종목
1964년 도쿄 올림픽 10000m 종목에서 6위를 기록했다. 올림픽 마지막 날 마라톤에도 출전, 주경기장에 들어설 당시에는 2위였으나 마지막 한 바퀴에서 전력질주한 영국의 베이질 히틀리에게 추월당해 3위로 경기를 마쳤다. 이는 "남자는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아버지의 훈계를 지키려다 트랙에서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탓이 컸다.[19] 히틀리에게 패배한 것에 굴욕을 느낀 쓰부라야는 동료 마라톤 선수 기미하라 겐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난 일본 국민들 앞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어리석은 실수를 저질렀다. 멕시코에서 열릴 다음 올림픽에서 달려 일장기를 들어 올리는 것으로 보상해야만 한다."
도쿄 올림픽 이후, 쓰부라야는 힘든 시기를 보냈다. 자위대 체육학교 교장의 "다음 올림픽에 집중하라"는 압박으로 약혼이 파혼되었고, 오랜 기간 겪어왔던 허리 통증이 악화되어 추간판 탈출증이 발병하였다.
4. 사회적 영향과 유산
쓰부라야 고키치의 죽음은 일본 스포츠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선수들의 심리적 건강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26] 그의 유서는 언론에 공개되어 여러 문학가에게 영감을 주었고, 다양한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었다.[24]
카와바타 야스나리는 유서 속 “맛있었습니다”라는 평범한 표현이 “순수한 생명을 살고 있다”고 평가하며 “천만 마디 말로도 다 할 수 없는 애절함”이라고 극찬했다.[24] 미시마 유키오는 “상처받기 쉬운, 용감한, 아름다운 자존심에 의한 자살”[25]이라 표현했고, 테라야마 슈지는 “자살이라기보다는 타살”[25]이라고 언급했다. 사와키 코타로는 유서에서 “어렸을 때 들었던 주문이나 불길한 주문 같은 울림이 있다”고 평했다.
카라쥬 쥬로와 사토 신은 희곡에, 영화 역 STATION은 타카쿠라 켄이 연기한 전 올림픽 사격 선수와 겹쳐지는 형태로 유서를 도입했다.[25]
기미하라 겐지는 사망 소식을 듣고 “억울하다”며 사택 근처 경기장을 3000m 전력 질주했다. 그는 1964년 올림픽 8위 후 자살을 생각했었고, 쓰부라야의 죽음 후 “내가 3위였다면…”이라는 말을 남겼다.[23]
4. 1. 선수 정신 건강 문제에 대한 인식 제고
쓰부라야 고키치는 1964년 도쿄 올림픽 마라톤에서 베이질 히틀리에게 역전당해 3위를 차지한 것에 대해 큰 굴욕감을 느꼈고, 기미하라 겐지에게 다음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들어 올려 보상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18] 그러나 도쿄 올림픽 이후, 쓰부라야는 자위대 체육학교 교장의 압박으로 약혼이 파혼되고, 추간판 탈출증이 발병하는 등 힘든 시기를 겪었다.쓰부라야는 약혼자와의 결혼을 준비하며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고,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하기도 했다. 가족들도 약혼을 인정하고 1965년 4월에는 결혼이 확정되었으나, 7월에 약혼자가 변심하여 파혼 위기를 겪었다. 주변의 도움으로 관계가 회복되는 듯했으나, 1966년 5월에 다시 결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 자위대 체육학교 교장 요시이케는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이후로 연기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요시이케가 동의했지만, 이 과정에서 약혼자와 그 가족은 결혼에 대한 불안감을 느꼈다.
1966년 10월, 약혼자는 결혼을 미뤄달라고 요청했고, 결국 쓰부라야에게 선물과 편지를 돌려보내며 파혼했다. 약혼자는 쓰부라야와의 관계가 일방적이었고, 결혼에 대한 온도 차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또한 요시이케 교장의 반대가 파혼의 결정적 이유는 아니었다고 밝혔다.
쓰부라야는 약혼자와 주고받은 편지를 노트에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고, 그 내용은 약혼자의 증언과는 차이가 있다. 쓰부라야의 편지를 연구한 마쓰시타 시게노리는 약혼자의 진심을 확인하려 했으나, 그녀는 건강 악화로 인해 의사소통이 어려웠고, 쓰부라야에 대한 감정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66년 7월, 쓰부라야의 코치였던 하타노가 홋카이도로 전근을 가게 되면서 쓰부라야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일반 부대로 옮기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고, 성적 부진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하타노의 전근은 자위대 인사 이동 규칙에 따른 것이었고, 쓰부라야의 자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4. 2. 문학과 예술에서의 재조명
쓰부라야 고키치의 이야기는 문학과 예술 작품에서 그의 비극적인 삶과 스포츠 정신을 재조명하는 소재로 다루어졌다. 특히, 1964년 도쿄 올림픽 마라톤에서 베이질 히틀리에게 역전패 당한 순간과 그 이후의 심리적 갈등, 그리고 멕시코시티 올림픽을 앞두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건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쓰부라야는 "난 일본 국민들의 앞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어리석은 실수를 저질렀다. 난 멕시코에서 열릴 다음 올림픽에서 달려 일장기를 들어 올리는 것으로 보상해야만 한다."[19]라고 말하며 다음 올림픽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지만, 결국 좌절과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유서에는 "아버지 어머니, 고키치는 이미 완전히 지쳐버려서 달릴 수 없습니다."[19]라는 내용이 담겨 있어 그의 고뇌를 짐작하게 한다.
쓰부라야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적 비극을 넘어, 당시 일본 사회의 분위기와 스포츠계의 압박감 등을 반영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의 코치였던 畠野(하타노)의 전근과 새로운 교장과의 갈등[19] 등 주변 환경의 변화 역시 그의 심리적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4. 3. 쓰부라야 고키치 기념 사업
쓰부라야 고키치의 사후, 유품을 전시한 "쓰부라야 고키치 기념관"이 그의 실가에 개설되었다.[19] 이는 "부모님 곁에서 살고 싶었습니다"라는 유서 내용을 받들어 그의 아버지의 뜻으로 이루어졌다.[19] 2006년 6월, 유족의 고령화로 인해 전시품을 시에 기증하고 가을에 기념관은 폐관하였다. 이후 스가카와시에서는 시영 스가카와 아레나에 전시 코너를 설치, 같은 해 10월 메모리얼 마라톤 개최 기념 특별 전시를 거쳐 2007년 1월 7일부터 "쓰부라야 고키치 메모리얼 홀"로 정식 공개하였다.스가카와시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83년부터 "쓰부라야 고키치 메모리얼 마라톤"을 개최하고 있다.
2020년 3월 12일, 고리야마시에서 열린 2020년 도쿄 올림픽 마라톤 대표 선수들의 기자회견에 앞서 선수 관계자들이 그의 묘소를 참배했다.[27]
스가카와시는 2021년에 쓰부라야 에이지와 함께 쓰부라야 고키치에게 "명예 시민" 칭호를 수여하기로 결정,[28] 같은 해 7월 7일에 수여식을 거행했다.[29]
2023년 4월 1일부터는 "두 명의 쓰부라야" 현창 사업의 일환으로 스가카와 아레나를 "쓰부라야 고키치 메모리얼 아레나"로 개칭했다.[30]
5. 기타
쓰부라야 고키치는 남들보다 훨씬 노력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31] 훈련 파트너였던 미야지 미치오는 그를 "약한 소리를 하지 않고, 결정한 일은 끝까지 해내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32] 키무라 켄지는 뉴질랜드 합숙 당시, 쓰부라야 고키치가 목욕 후 벗은 옷을 모두 꼼꼼하게 다려 개는 모습에 놀랐다고 한다. 이는 아버지의 가훈("신발과 옷은 정돈한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쓰부라야 고키치는 1964년 도쿄 올림픽 전 합숙 때 책을 읽던 키무라 켄지에게 누드 사진이 실린 잡지를 보여주거나, 주오대학 친구에게 빌린 야한 소설을 읽고 엽서에 "재밌는 소설, 매우 흥미롭게 읽었습니다"라고 적는 등 장난기 넘치는 면모도 보였다.
쓰부라야 고키치의 마라톤 개인 최고 기록은 1964년 도쿄 올림픽 코스에서 기록한 2시간 16분 22.8초이다. 다음은 쓰부라야 고키치의 주요 마라톤 대회 기록이다.
년월 | 대회명 | 기록 | 순위 | 비고 |
---|---|---|---|---|
1964년 3월 20일 | 중일 마라톤 | 2시간 23분 31초 | 5위 | |
1964년 4월 12일 | 매일 마라톤 | 2시간 18분 20.2초 | 2위 | 도쿄 올림픽 코스, 도쿄 올림픽 대표 선발전 |
1964년 8월 | 타임스 마라톤 | 2시간 19분 50초 | 2위 | |
1964년 10월 21일 | 도쿄 올림픽 | 2시간 16분 22.8초 | 3위 | 육상 경기 일본 대표 선수 중 유일한 메달 |
1965년 8월 | 타임스 마라톤 | 기록 없음 | 중도 기권 | 28km 지점에서 리타이어 |
1967년 3월 | 미토 마라톤 | 2시간 23분 37초 | 9위 |
5. 1. 인물됨
쓰부라야 고키치는 남들보다 훨씬 노력하는 사람이었고, 책임감도 강했다.[31] 훈련 파트너였던 미야지 미치오는 그를 두고 "절대로 약음(弱音)을 토(吐)하지 않는다. 결정한 일은 끝까지 해낸다"는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32] 키무라 켄지는 뉴질랜드 합숙 당시, 목욕 후 벗은 옷을 모두 꼼꼼하게 다려 개는 모습에 놀랐다고 한다. 이러한 습관은 아버지가 가훈으로 삼았던 네 가지 중 하나("신발과 옷은 정돈한다")에서 유래했다(다른 세 가지는 "자기 일은 스스로 한다", "부르면 대답한다", "사람에게 인사한다").한편, 1964년 도쿄 올림픽 전 합숙 때는 책을 읽고 있던 키무라 켄지에게 "이쪽이 더 재밌어"라며 누드 사진이 실린 잡지를 보여주거나, 주오대학 친구로부터 선배가 쓴 "야한 장면도 나오는 야한" 소설을 빌려 읽고, 엽서에 "재밌는 소설, 매우 흥미롭게 읽었습니다"라고 적는 등 장난기 넘치는 면모도 있었다.
쓰부라야 고키치의 마라톤 개인 최고 기록은 1964년 도쿄 올림픽 코스에서 기록한 2시간 16분 22.8초이다. 다음은 쓰부라야 고키치의 주요 마라톤 대회 기록이다.
년월 | 대회명 | 기록 | 순위 | 비고 |
---|---|---|---|---|
1964년 3월 20일 | 중일 마라톤 | 2시간 23분 31초 | 5위 | |
1964년 4월 12일 | 매일 마라톤 | 2시간 18분 20.2초 | 2위 | 도쿄 올림픽 코스에서 개최, 도쿄 올림픽 대표 선발전 |
1964년 8월 | 타임스 마라톤 | 2시간 19분 50초 | 2위 | |
1964년 10월 21일 | 도쿄 올림픽 | 2시간 16분 22.8초 | 3위 | 동 올림픽에서 육상 경기 일본 대표 선수 중 유일한 메달 획득 |
1965년 8월 | 타임스 마라톤 | 기록 없음 | 중도 기권(棄権) | 28km 지점에서 리타이어 |
1967년 3월 | 미토 마라톤 | 2시간 23분 37초 | 9위 |
5. 2. 쓰부라야 고키치를 다룬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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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웹사이트
Kokichi Tsuburaya
https://web.archive.[...]
[2]
웹사이트
Profile of Kokichi Tsuburaya
http://www.all-athle[...]
2014-12-03
[3]
뉴스
Schollander, Hayes were spectacular at Tokyo Games
http://www.japantime[...]
The Japan Times
2014-10-18
[4]
웹사이트
The Agony of Defeat
http://www.time.com/[...]
TIME Asia
2009-04-21
[5]
뉴스
Elegy for a Heartbroken Medalist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2021-07-18
[6]
웹사이트
Tsuburaya's suicide note
http://npo-kazokusou[...]
1968-01-09
[7]
웹사이트
The Triumphant Tragedy of Marathoner Kokichi Tsuburaya Part 4: A Suicide Note that Captures an Essence of the Japanese, and Endures as Literature
https://theolympians[...]
2017-09-12
[8]
웹사이트
The Tragic Death of a Japanese Olympian
https://www.jwkash.c[...]
2017-09-12
[9]
웹사이트
20世紀日本人名事典
https://kotobank.jp/[...]
[10]
뉴스
<聖火 移りゆく 五輪とニッポン>第1部 もう走れません(2) 不況下「陸上で日本一に」
https://www.tokyo-np[...]
2020-01-15
[11]
뉴스
<聖火 移りゆく 五輪とニッポン>第1部 もう走れません(3) 黙々と2人きりの特訓
https://www.tokyo-np[...]
2020-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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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日本陸上競技連盟七十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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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女子マラソン代表では、1992年バルセロナオリンピックの代表となった小鴨由水が、本番までのマラソン1回、初マラソンからの期間6か月と6日という記録を残している。
[14]
간행물
陸上競技マガジン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1965-01
[15]
웹사이트
夢と感動と愛を与えた日本陸上界の偉人5人
https://spaia.jp/col[...]
【SPAIA】スパイア
2016-07-23
[16]
비디오
1964年ニュースハイライト(1964年(昭和39年)12月30日)
https://www.youtube.[...]
2021-09-18
[17]
뉴스
東京五輪金メダル1号、重量挙げ・三宅義信 妻の支えが五輪連覇の原動力
2020-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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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중일신문
1995-04-0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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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ポーツ100年 円谷幸吉とその時代
1999-10-09
[20]
서적
オリンピック全大会 人と時代と夢の物語
朝日新聞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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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서적
オリンピック全大会 人と時代と夢の物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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勝田全国マラソンの歴史
https://katsutamarat[...]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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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火 移りゆく 五輪とニッポン>第1部 もう走れません(1) 円谷の悲劇
https://www.tokyo-np[...]
2020-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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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島由紀夫「円谷二尉の自刃」(産経新聞 1968年1月13日に掲載)。『蘭陵王』(新潮社、1971年)、『決定版 三島由紀夫全集第34巻・評論9』(新潮社、2003年)に所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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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立スポーツ科学センター(JISS)での心理サポートの現状
https://psych.or.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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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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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国から力を」マラソン代表らが円谷さんの墓参り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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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人の円谷」須賀川の名誉市民に 幸吉選手と英二監督
https://kahoku.news/[...]
2021-04-0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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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人の円谷」に名誉市民賞 「特撮の神様」円谷英二監督と五輪銅メダル円谷幸吉選手 福島県須賀市
https://www.minpo.jp[...]
2021-07-08
[30]
웹사이트
施設案内 円谷幸吉メモリアルアリーナ(旧:須賀川アリー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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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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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ーパスターに学ぶバスケットボール
ナツメ社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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円谷幸吉 「時代」に殉じたランナー 【オリンピック・パラリンピック アスリート物語】
https://www.ssf.or.j[...]
2019-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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